Here's my dents in the universe

부처가 된 젠야타


영화 <인류멸망보고서 - 천상의 피조물>은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한 세상의 모습을 그린다. 로봇 RU-4는 본래 스님들을 도와 절간의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는 도우미 로봇이었으나, 스스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이제는 스님들에게 본인의 깨달음을 설파하는 경지에 이른다. 이 소식을 접한 인공지능 로봇회사 UR은 RU-4가 인류를 위협하는 실패작이라 보고 강제 해체를 결정한다. UR의 회장은 절간에 직접 방문해 무력을 동원하여 RU-4를 회수하려 하지만, RU-4는 자신을 잡으려는 보안요원들을 힘으로 무력화한다. RU-4는 인간들에게 본인이 참선을 통해 깨달은 것을 설파하고, 열반에 올라 부처가 된다.

알파고와 이세돌이 바둑을 두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이 2016년 3월의 일이니, 그새 2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바둑 전문가와 인공지능 전문가 모두 이세돌의 압도적인 승리를 점쳤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4 : 1의 전적으로 이세돌의 완패. 세계 정상급 바둑기사를 이긴 것으로도 모자라, 알파고는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발전했다. 인간의 도움 없이 스스로 바둑을 깨우친 알파고 ZERO는 이세돌과 경기했던 알파고와 100번 겨뤄 100번 이겼다고 한다. 이제는 이 세상에 자신의 적수가 없음을 깨닫고, 바둑의 부처가 되어버린 알파고는 웹사이트(https://alphagoteach.deepmind.com)에서 자신이 깨달은 바둑의 정수를 가르쳐준다고 하니 관심이 있는 사람은 배워도 좋을 것 같다.

전문가들은 20년 안에 직업의 절반, 30~40년 안에 직업 대부분이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말한다. SF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로봇들이 인간을 지배하려 들 것이라는 상상보다, 당장에 인간이 쓸모없어지는 현실이 더 두렵다. 우리의 일상은 ‘일’을 중심으로 짜여있다. 좋든 싫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온다면, 우리는 어떤 것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까? 평창올림픽을 보며 나름의 답을 생각해보았다.

운동경기를 보다 보면, 인간보다 로봇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종목들이 눈에 띈다. 컬링은 손잡이가 달린 돌덩이를 얼음판 위에서 밀어, 적절한 곳에 위치시키는 스포츠다. 먼 미래에 컬링을 하는 로봇이 개발된다면, 그 로봇은 늘 정확한 각도와 힘으로 스톤을 원하는 곳에 정지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봇이 하는 정확한 컬링이 과연 재미있을까 묻는다면, 글쎄, 나는 그 경기를 두 번 이상 보지 않을 것 같다. 혼성 피겨스케이팅 페어는, 출전한 남녀선수의 동작이 얼마나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득점 포인트가 된다. 하계 스포츠인 싱크로나이즈는 이름부터 대놓고 동작이 딱딱 맞아떨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대형을 맞추고, 동작을 일치시키는 것은 로봇이 더 잘하는 일이다. 로봇 여러 대가 늘어서서 음악에 맞춰 똑같은 춤을 추는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다.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그 춤이, 나에게 쾌감을 주지 못하는 것은 도대체 왜일까.

얼음판 위에서 돌을 미는 것은 재미없지만, 컬링은 재미있다. 규칙이 있어, 어렵기 때문이다. 상대편의 스톤을 맞히면서, 혹은 피하면서 맞닥뜨리는 어려움, 그 어려움을 해결해 나가면서 얻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피겨스케이팅 페어에 나온 선수 둘이 제각각 맘대로 점프하고 이리저리 쏘다닌다면, 보는 사람에게 큰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이다. 두 사람이 동작을 맞추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에, 피겨스케이팅을 보는 것이 그토록 재미있는 것이다.

웬만한 수학 문제는 울프럼알파가 더 잘 푼다. 하지만 미적분을 처음 배워서 그것을 응용해낼 때의 쾌감을 선물해주지는 못한다. 언젠가는 월드 베스트 인간 축구선수 팀이 로봇 축구팀에게 패배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는 축구를 계속 이어나갈 것 같다. 상대편 선수를 제치고 골대에 공을 집어넣을 때 오는 강한 쾌감, 동료 선수와의 교감에서 오는 전율, 우리 팀을 응원할 때 오는 동질감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 결과가 아닌 그 과정에서 오는 행복을 느끼고 싶기 때문에 우리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이 아닐까.

<인류멸망보고서>에 나왔던 로봇 RU-4의 마지막 설파의 일부를 옮긴다. “무엇을 두려워 하십니까? 집착과 갈애, 선업과 악업, 깨달음과 무명이 모두 본디 공허함을 본 로봇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이미 그 자체가 완성되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어찌하여 로봇만 득도한 상태로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들이여, 당신들도 태어날 때부터 깨달음은 당신들 안에 있습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로봇에게 빼앗기게 되었을 때, 모두가 참선을 통해 세상사가 다 공(空)임을 깨닫고 부처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뜬구름 같은 깨달음 말고, 손에 잡히는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의미는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여하는 것이다. 얼음판 위에 줄을 그어놓고 컬링을 하는 것처럼, 아무런 용도가 없는 삼회전 점프에 높은 점수를 주는 것처럼. 로봇이 세상의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날이 온다고 할지라도, 인류는 불완전한 무언가를 열심히 붙들고 있을 것 같다. 완벽하게 의미 없는 것에서, 의미를 찾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