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s my dents in the universe

딸기 크루아상


카페에 들어가 생각한다. 크루아상을 반으로 갈라 딸기와 생크림을 얹어놓은 디저트. 가격은 3,500원이다. 먹을까 말까. 엄청 비싼 것은 아니지만, 메뉴판 앞에서는 늘 멈칫한다.

어릴 적 우리 집은 통닭집을 했다. 치킨집이 아니고 통닭집인 것은, 우리 집 간판이 그렇게 써놓았기 때문이다. 가난 탓에 가방끈이 짧은 어머니는 방직 공장, 신발 밑창 꿰매기 부업 등으로 생계를 꾸리셨다. 어머니는 부부의 월급만으로 삼 남매를 키워내기가 어렵다 판단하고 통닭집을 개업하셨다.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경기가 좋을 때는 잘 팔리다가도, 하루에 주문이 한 건도 없는 시기가 있었다. 생계를 위한 장사라는 것은 실로 사람의 영혼을 빼놓았다. 어머니는 개점과 폐점이 따로 없이 한 마리라도 주문이 들어오면 새벽에라도 가게에 나가 일하셨고, 간만의 오붓한 가족 외식의 날에도 어머니는 전화 주문을 받고 중간에 자리를 뜨기 일쑤였다. 배달하는 사람 고용할 돈을 아끼기 위해 어머니께서는 몸소 오토바이를 끌고 배달에 나가셨는데, 얄궂게도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이면 주문 건수가 배로 늘어났다. 그렇게 바쁜 날이면 급한 마음에 교통사고가 나 병원에 입원한 것도 여러 번이다. 어린 기억 속의 어머니는 늘 바쁘고, 아프고,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일찍 철이 들었다. 그 어린 것이 얼마나 속이 깊었겠나. 눈치만 살피게 된 것이다. 집안의 형편을 알기에 나는 용돈을 받지 않았다. 준비물 등으로 꼭 사야 할 것이 있을 때만 1,000원, 2,000원씩 받아서 썼다. 그러다가 옆집 어르신이 주신 용돈 5,000원을 손에 쥐게 되었다. 나는 그 돈을 쓰지 못했다. 목적이 정해지지 않은 돈을 쓸 줄 몰랐기 때문이다. 돈도 써본 놈이 쓸 줄 안다는 말이 참으로 맞다. 돈을 원하는 곳에, 잘 쓰는 것도 어릴 적에 행해지는 교육이다.

대학생이 되어서 한 달에 50만 원이라는 큰돈을 용돈으로 받게 되었다. 갑자기 큰돈과 자유가 주어지니, 한을 풀듯 흥청망청 썼다. 날마다 배달 시켜먹고, 술 마시고, 월말에 돈이 다 떨어지면 친구에게 돈을 꾸었다. 좀 비싸도 좋은 거 먹자, 좋은 거 사자. 다 경험이야. 돈을 관리하지 않았다. 편히 얻어지는 돈이었으니까. 엄마가 어떻게 돈을 마련해 나에게 보내주는지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으니까. 돈을 쓰면서 마음이 개운했냐고 물으면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항상 뒷맛이 씁쓸했다.

그래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 앞에 서면 망설이게 된다. 이제는 엄마가 준 돈이 아니라 국가에서 주는 군인 월급이지만, 그래도 그렇다. 군인 월급은 내가 일해서 받는 돈 같지가 않다. 투입한 노동에 비해 보상이 터무니없이 적으니 인지 부조화가 이는 것이다. 군인이 돈 쓸데가 어디 있냐 하지만, 책 몇 권 사고, 외출 나가서 밥 먹고 하면 월급이 빠듯하다. 다행히도 이번 달부터 군인 월급이 많이 오른다. 내 월급이 20만 원에서 36만 원으로 오르니 거의 2배가 오르는 것이다. 이 돈으로 책도 여유 있게 사고, 인터넷 강의도 신청해 들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 아빠 영화 티켓이라도 예매해서 보내드려야겠다.

전역 후 계획이 있다. 가장 먼저,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부모님 용돈을 드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 마음의 부채가 사라질 것 같다. 그런 후에야 이 딸기 크루아상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