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ADY, PLAYER, YOU
근무지 옆에 작은 밭이 있다. 가로 4미터, 세로 1.5미터의 텃밭인데, 센터장님이 매일 굽어살피며 상추를 키우신다. 엊그제 가서 보니, 봄에 심은 씨앗이 어느새 한 뼘 높이까지 자랐다. 이파리가 무성하여 상추를 따는데,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상추가 흙에서 자라는구나.’ 그래, 상추가 쌈 싸 먹는 채소이기 이전에 식물이었지. 그럼 흙에서 자라는 것이 당연할진대, 왜 흙에서 삐죽 튀어나온 그 상추 무더기가 그리도 낯설어 보였을까.
나에게 상추는 흙밭보다 이마트 싱싱 코너에 더 가까운 물건이었다. 흙이라고는 묻어있지 않고, 줄기의 끝부분이 깔끔하게 다듬어진. 비슷한 크기의 상추끼리 차곡차곡 쌓여있고, 싱싱해 보이기 위해 인공 안개가 뿌려지고 있는 모습. 나에게 상추란 그런 것이었다.
꽁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따금 어머니가 해주시는 꽁치 김치찌개를 먹으며, ‘엄마, 꽁치는 뼈가 없어서 좋다’ 했다. 살면서 본 꽁치라고는 꽁치통조림밖에 없었던 어린 나는, 꽁치가 뼈가 없는 생선이라고 믿었다. 꽁치라는 생선이 머리와 꼬리 없이 먹기 좋게 뼈가 잘 발린 채로 바다에 헤엄쳐 다닐 리 없다는 걸, 나는 몰랐다.
내가 먹는 채소가, 조리된 생선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의 식탁으로 오는지 모르는 삶은, 현실과 너무도 멀리 떨어진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산품처럼 언제나 재고가 쌓여있는 식품코너를 보며, 음식물 또한 공장 프레스에서 착착 찍혀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던가. 상추는 흙밭에서 땡볕을 맞으며 자라고, 꽁치는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던 물고기였다는 걸. 밭의 상추에는 흙이 묻어있을 수도 있고, 벌레가 앉아있을 수도 있지만, 바다에서 꽁치를 낚다가 팔을 물릴 수도 있지만, 그렇지만 그게 진짜라는 걸.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세상에는 현실만큼이나 중요한 가상세계 ‘오아시스’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가상세계의 물건을 사기 위해 현실의 물건을 팔기도 한다. ‘오아시스’ 안의 사람들은 손가락을 휘리릭 돌려서 차에 기름을 넣고, 원하는 물건을 산다. 우리도 인터넷에 접속해 마우스로 클릭클릭해서 꽁치통조림을 배송시키고, 원하는 영상을 뚝딱 재생시키지 않았던가. 영화 속의 사람들은 실제로 걸어 다니면서 보기라도 하지, 우리는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으니 누가 더 가상세계에 사는지 모르겠다.
아날로그가 뜨고 있다 한다. 필름 카메라를 모방한 모바일 앱 ‘Gudak’은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고, LP판으로 노래를 틀어주는 카페, 독립 서적들을 다루는 작은 서점들도 늘고 있다. 왜 사람들은 편한 디지털을 두고, 굳이 불편한 아날로그를 찾는 걸까. 과학자 정재승 씨는 이를 ‘뇌와 몸의 균형을 향한 갈구’라 설명한다. ‘디지털은 뇌만 자극하지만, 아날로그는 몸도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는 ‘디지털 문명 세례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현대인들의 뇌는 지나치게 많은 자극을 받는 반면, 몸을 쓰고 반응하는 시간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몸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뇌가 그것을 해석하고 결정하면, 다시 몸이 세상에 적용하는 일상적 경험을 우리는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기억에 남는 좋은 기억들은 다 몸이 고생했다. 여럿이 떠났던 자전거여행, 길바닥에 드러눕고 싶었던 국토대장정, 땡볕에 고생했던 베트남, 틈만 나면 새벽까지 보고서 썼던 엘글챌, 알람 끄고 더 자고 싶었던 새벽 아르바이트, 스트레스의 극대점이었던 논산훈련소까지. 그때는 힘들어서 당장 그만두고 싶었지만, 돌이켜보니 추억보정의 효과가 이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 그렇게 고생했지만, 그래도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이, 보는 것보다는 해보는 것이 낫다는 결론이다. 아무리 말을 잘해도 전화보다는 영상통화가, 영상통화보다는 실제로 만나는 것이 나은 것처럼. 그래서 에어비앤비가 그렇게 직접 살아보라고 광고하는 거고, 학교에서는 그렇게 여름 인턴을 나가라고 하는 것일 게다.
좋은 기억들의 공통점이 또 있다. 모두 방학에 했다는 거다. 학기 중에는 이것저것 챙기다 보면 많은 시간을 내지 못할 때가 많다. 군인도 그렇다. 나는 제주도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지만, 정작 밖에 나가지를 못하니 친구들보다 제주도를 더 모른다(ㅠㅠ) 그래서 선임이랑 같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네이버 거리뷰로 제주도 여행하고 그랬다.. (오열) 근무 비번인 날에는 할 게 없으니 온종일 컴퓨터만 하다가, 이러다 정말 바보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요즘엔 짬짬이 땀 흘리는 운동도 하고, 책도 읽는다. 거진 라푼젤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디테일이 탁월한 책을 읽고, 실감나는 영상을 봐도 진짜만 못하다. 진짜 경험에는 흙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마우스 클릭으로 돌아다니는 로드뷰 여행이 아닌, 배낭을 매고 다니느라 다리가 아픈 그런 여행을 해보자. 누군가가 먹기 좋게 정리해놓은 통조림 같은 리뷰를 읽는 게 아닌, 팔이 물리는 한이 있더라도 직접 경험을 낚아 올려 보자. 그런 삶을 실천해보기에 대학생의 방학만큼 좋은 시간이 있나 싶다. 그래서 더, 방학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