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걷는 거리, 거리마다
아빠랑 목욕탕에 갔다. 간만에 집에 왔으니 10시까지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찍 일어나 TV를 보고 계시던 아빠를 졸라 밖을 나섰다. 오랜만에 걸어도 내 동네는 늘 정겹다.
내가 사는 주월동은 그리 개발된 곳이 아니다. 2층짜리 낮은 주택들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끼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꽤나 낙후된 곳이다. IoT, 스마트홈 광고를 하는 요즘 시대에 가장 뒤처진 곳이 아닐까 싶다. 놀러 온 친구 보여줄 멋진 곳도 없고 이렇다 할 맛집도 없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나를 이루는 벽돌이 되어준 곳이다. 내 생의 가장 빠른 기억들은 모두 이곳에서 일어났다.
유치원에 가기 싫었던 아침 날, 이불로 귀를 막고 자는 시늉을 했던 기억. 그리고 유치원에서 걸려오던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 바로 옆 연립주택으로 이사할 때 먹었던 음료 아침햇살의 맛. 밤이면 무서워서 입구에서부터 냅다 달렸던 어두운 골목길.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 개가 짖어대는 집.
이제는 볼 수 없어진 것도 많다. 학창시절 내 간식을 책임졌던 문방구 ‘아이러브스쿨’, 틈만 나면 자러 갔던 명성이네 집. 리어카에 과일을 잔뜩 싣고 메가폰으로 소리를 키워 장사하시던 할아버지. 다들 어디에 계신가요.
목욕탕에서 아빠 등을 밀어드렸다. 아버지도 우리 동네만큼이나 참 많이 변하셨다. 평생 못 끊을 줄 알았던 담배를 첫 손주가 생기자마자 끊어서 벌써 몇 년째 금연중이시다. 뚱 튀어나왔던 배도 서서히 들어가는 중이고. 이제는 은퇴하실 나이가 되셔서 그런지 흰머리도 주름살도 많이 느셨다. 그래도 무뚝뚝한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만요.
아빠 등을 탁 쳐서 물을 뿌리라는 신호를 보낸다. 아빠도 내 등을 밀어준다. 어릴 땐 아빠가 내 등을 밀어줄 때 왜 그렇게 아팠을까. 목욕탕 물은 왜 그렇게 뜨거웠을까. 나도 진짜 다 컸나봐. 하나도 안 아프네.
집으로 걸어오면서 아이스크림을 샀다. 엄마는 내가 아이스크림 사먹는 걸 싫어하지만, 아빠는 무조건 오케이다. 집으로 들어가서 엄마한테 더블비얀코를 권했다. 아빠들은 이렇게 건강 생각 안 한다고 구박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예상 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아들 고마워~’ 엄마도 이제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걸 보니 엄마도 변했네 변했어
…
가끔씩 난 아무 일도 아닌데 괜스레 짜증이 날 땐 생각해 나의 동네에 올해 들어 처음 내린 비
짧지 않은 스무 해를 넘도록 나의 모든 잘못을 다 감싸준 나의 동네에 올해 들어 처음 내린 비
내가 걷는 거리 거리 거리마다 오 나를 믿어왔고 내가 믿어가야만 하는 사람들 사람들
그리고 나에겐 잊혀질 수 없는 한 소녀를 내가 처음 만난 곳
둘이 아무 말도 없이 지치는 줄도 모르고 온종일 돌아다니던 그 곳 내 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