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s my dents in the universe

지적 생명체의 만족스러운 멸종 가설


1. 페르미 역설

외계인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회자되는 몇 가지 가설이 있다. [우리가 바로 지구에 방문했던 외계인의 후손]이라는 맨 인 블랙 가설부터, [외계인은 존재하지만, 어떠한 이유로 지구에 방문하지 않고 있다]는 소심/조심 외계인 가설까지.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어느 정도 문명이 발전하면, 핵전쟁 등의 이유로 자멸하기 때문에 우주여행에 나선 지적 생명체가 없었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은 마치 ‘그들이 자멸하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우주여행에 나섰을 것’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한때 나를 사로잡았던 가설이지만, 최근에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어쩌면, 우주에서 지적 생명체가 발견되지 않는 까닭은 [어느 정도 문명이 발전하면, 지적 생명체가 우주여행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은 아닐까? 여기부터 나의 가설이다.

2. 지루함의 멸종

모바일 디바이스의 등장 이후, 먼 거리를 이동하는 일이 더는 두렵지 않게 되었다. 유튜브, 넷플릭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이 나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콘텐츠를 제안해주기 때문이다. 쓸수록 정교해지는 알고리즘으로, 그들의 제안은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다. 잠들어야 할 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도저히 휴대폰을 내려놓을 수 없는 상황을 모두 경험해봤을 것이다.

‘지루함’이라는 감정은 이번 세대를 마지막으로 멸종될 것이다.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지성들이 빅테크 기업에 모여 당신의 지루함을 빼앗고 시선을 가져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이미 경쟁은 심화되었다. 이들이 준비하는 다음 콘텐츠는 무엇일까?

3. 시뮬레이션 세상의 등장

통계적으로 가장 오랜 시간 몰입할 수 있는 콘텐츠는 바로 ‘게임’이다. 미국 10대를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이들의 일간 로블록스 평균 접속 시간(156’)은 틱톡, 유튜브, 인스타그램(각각 58’, 54’, 35’)을 합친 것보다 크다. 경험적으로도 게임 매니아들이 게임에 몰입하는 시간은 다른 콘텐츠와 비교해 월등하다. 게임은 ‘인터랙션’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미디어보다 더욱 몰입감이 크다.

고도화된 게임은 곧 ‘실제 세상에서의 경험’을 대체할 것이다. 중세의 탐험가가 되어 새로운 대륙을 탐험하는 것도, 스파이로 잠입해 국왕을 암살하는 것도 실제 세상에서 경험하기엔 어려운 일이지만, 게임 속에서는 어렵지 않다. 십수 년 이내에 VR 컨트롤러의 비약적 발전으로, 시뮬레이션 세상의 인터랙션이 실제 세상과 구분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인류는, 빅테크 기업이 제안하는 시뮬레이션 콘텐츠에 매료되어 현실 세계의 경험에 흥미를 잃게 된다. 그렇게 우주라는 미지의 세상을 향한 호기심은 무제한의 성취감을 제공하는 시뮬레이션 탐험 콘텐츠에 밀려 서서히 잊혀져 간다.

4. 당신은 시뮬레이션 속에서 가장 만족스럽다.

극도로 발전한 기술이 앗아간 것은 우주여행에 대한 호기심뿐만이 아니다. 곧이어 인류는 현실 인간관계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인류의 뇌는 복잡한 인간관계를 핸들링하기 위해 이토록 복잡하게 진화해왔다. 타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골치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 나에 대한 정보를 모두 꿰뚫고 있는 인공지능이 내 비위를 맞추는 일은 너무나 쉽다.

영화 ‘그녀(her)‘의 주인공 테오도르는 인공지능 OS 사만다와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다. 그럴 수밖에. 테오도르의 모든 데이터를 수집한 사만다는 그의 심기를 거스를 일이 없다. 사만다는 테오도르 얼굴의 미세한 움직임, 미묘한 어조의 변화를 감지해 그의 기분 변화를 추적할 것이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의 기분을 케어해줄 것이다. 테오도르는 인공지능 그녀를 거절할 수 없다.

시뮬레이션 세상에서 만나게 될 인공지능 ‘심심이’는 당신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될 것이다. 시뮬레이션 속 소개팅에서 만난 인공지능 ‘이루다’는 당신에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할 것이다.

5. 지적 생명체는 만족스러운 멸종을 선택한다.

질척거리는 현실 세계의 관계에 흥미를 잃은 인류는, 번식에 대한 흥미 역시 잃어버린다. 그보다 만족스러운 시뮬레이션 속 관계가 있다. 인류는 핵전쟁이나 환경 파괴로 멸종하지 않는다. 지루할 틈 없이 만족스러운 멸종을 스스로 선택한다.

먼 훗날, 우주의 어느 외딴 행성에 거주하는 지적 생명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넓은 우주에 우리 이외의 지적 생명체는 왜 발견되지 않느냐’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