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s my dents in the universe

행운을 빌어요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아닌 우리같은 범인들은 누구나 두려움을 가지고 산다. 그 두려움의 뿌리를 파헤쳐보면 결국 ‘죽음’이라는 근원에 도달하게 된다. 호모 사피엔스의 뇌는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행위에는 쾌감을, 생존에 위협이 되는 행위에는 불쾌한 감정을 느끼도록 진화해왔다. 맛있는 간식으로 강아지가 묘기를 부리도록 훈련하는 것처럼, 뇌는 쾌감과 불쾌감을 이용해 인간이 생존에 유리한 활동을 지속하도록 유인해왔던 것이다.

여타 야생 동물들과 비교해 신체적 능력치가 한없이 낮은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아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큰 무리를 지어 생활했기 때문이다. 호시탐탐 인간을 노리고 있는 맹수들이 산재해있는 야생에서, 집단으로부터 떨어진다는 것은 곧 생존 가능성이 급격히 낮아짐을 의미했고, 이는 사회성이 높아 집단으로 무리 지어 있는 시간이 많았던 개체가 자연 선택되는 결과를 낳았다. 수만 년의 인류 진화의 역사 동안, 이 데이터는 DNA에 누적되었고 인간은 집단 내에 숨어있는 것에서 안정감을 얻게 되었다. 즉, 개인은 집단 내의 대세에 편승하여 다수가 하는 행동을 따라 하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소속감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때문에 모두가 오답을 말할 때 정답을 말하기는 정말 어렵고, 3명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내가 안 쳐다볼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집단에서 소외되는 것은 실제적인 고통을 수반한다. 연구자들은 소외감과 같은 사회적인 고통을 관장하는 뇌의 부위와 신체적인 고통을 관장하는 부위가 거의 겹친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니까 혼밥하는게 두려운 건 그 사람이 특별히 소심해서가 아니라, 소외감이 실제로 그 사람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집단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하는 일이다.

대학교 2학년 시기의 방황은 매우 힘겨웠다. 밤마다 지곡연못에 앉아서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했다. 문득 내가 가진 것이 POSTECH이라는 대학 간판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대로 자퇴해서 그 간판마저 없어진다면, 나에게는 무엇이 남아있을까?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난 나는 어떤 사람일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일이었다. 자퇴할 용기는 없었고 휴학계를 썼다. 다들 학기를 진행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홀로 무리를 벗어나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면 정석적인 과정에서 벗어나 휴학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 울타리 밖에 홀로 서는 것에 성공했다기보다, 다른 울타리로의 전입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다. 결국, 어떻게든 다른 울타리를 찾아가게 되더라.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최근 잇달아 전역했고 곧 전역한다.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몸 담갔던 집단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해보니 조금 무서울 것 같기도 하고, 막막할 것 같기도 해서 괜히 감정이입해서 글을 써본다(부럽다). 뭐, 세 사람 다 워낙 조르바 같은 인물이기도 하고, 가만히 둬도 알아서 다른 울타리를 잘 찾아갈 사람들이라 걱정도 안 된다. 아무튼, 전역 축하하고, 어디에 있더라도 늘 용기와 행운이 함께하기를 바란다는, 그 말이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