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t life goes on
2013년 11월 7일이었다. 수학능력시험의 마지막 과목으로 선택한 ‘생명과학 II’의 OMR 마킹을 마치고 시계를 보니 시험 시간이 1분 정도 남아있었다. 아 진짜 끝났구나. 시험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벨이 울렸고 감독관이 내 OMR 답안지를 걷어가자, 고등학교 생활의 아련한 것들이 떠오르면서 마침표가 하나 찍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 인생에서 무언가 하나를 완전히 끝냈다는 느낌. 그도 그럴 것이 나같이 시키는 대로만 살아온 사람이 19세가 될 때까지 열심히 해볼 만한 것이라곤 수능 공부밖에 없기 때문일 거다. 시험장을 빠져나와 집에 가면서 느끼는 정체 모를 허무감을 나만 느낀 건 아닐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깟 시험이 뭐라고 가족이랑 같이 보낼 시간도 없게 만들었을까 싶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는 추억이 됐지만, 당시에는 한 번의 시험으로 내 실력을 평가받는다는 사실이 부당하게 느껴져 화가 났다. 시험 점수는 당시의 컨디션이나 상황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데, 어떻게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내 실력을 판단하려고 하지. 물론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는 능력도 결국 실력의 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고, 인생의 많은 부분이 그처럼 모든 변수를 고려해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이젠 수긍할 수 있게 됐다.
확실한 건 지금의 내가, 수능 날의 나보다 점수는 낮을지언정 훨씬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논리적이고, 똑똑한 시기가 고3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람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발전하더라. 뉴스나 영화를 보면서, 잡지나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내 안에서 번뜩하고 떠오르는 것을 발견했을 때 큰 희열을 느꼈다. 세상에는 수능 공부만 해서는 알 수 없는 재밌는 것들이 많았고, 경험이 쌓이면서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조금씩 연결되고, 더 잘 이해되기 시작했다. 코끼리 다리만 만져본 장님이 코끼리 코도 만져보고, 귀도 만져보면서 전체 코끼리의 형상이 어렴풋이 떠오르게 된 느낌이랄까. 아직은 내 안에 쌓여있는 밑천이 워낙 부족해서 무식한 소리만 내뱉지만, 언젠가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 소리를 당당히 외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라 믿는다.
학원에서 고3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좋은 대학 다녀서 좋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정말 좋은 점이 많았다. 20대의 초반을 POSTECH에서 보낸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입결이 높은 대학이라서 좋았던 게 아니라, POSTECH은 그냥 ‘좋은’ 대학이었다. 적은 수의 학생들이 만드는 끈끈함과 아기자기한 분위기, 학생들을 향한 아낌없는 지원, 포항이라는 소도시가 주는 아늑함까지. 그 장점들을 입결로 쉽게 치환해버리는 시선들이 아쉬웠다. 수험생이면 몰라도 성인이 되어서도 입결이니 수능 성적이니 따지는 사람은 유치하지 않나. 수능은 그때까지 공부 얼마나 착실히 했나 평가하는 시험일 뿐이고, 대학은 배움을 얻는 플랫폼일 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수능이 끝나고 나서도 내가 무엇을 배우고 있고,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지가 아닐까.
세상이 그리 순진하게 돌아가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알 나이도 됐지만, 철없이 꿈꾸는 소리를 하고 싶다. 그 ‘좋은 학교’를 자퇴할 용기도 없으면서 위선적이라고 욕해도 할 말 없다. 그래도 내가 느낀 것은 수능 이후에도 삶은 계속됐고, 수능 점수와 상관없이 나는 계속 발전했다는 것. 수능 공부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배움의 기쁨을 조금은 알게 되었고,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는 것. 나도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쥐뿔도 모르고 사회의 쓴맛도 보지 못한 23살 풋내기지만, 수능이 끝난 이후에도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는 충분히 있을 거라는 것. 그냥 그 말이 하고 싶었다.
수험생분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