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의 길목에 선 개발자
전공 교수님의 이야기
‘POSCO 같은 큰 공장을 설계하는 데에 화학공학 전공자가 몇 명 정도 필요할 것 같나요?’
화학공학과 2학년 전공필수 열역학 시간이었다. 열역학에서는 화학 반응이 얼마나 빠르게, 어느 정도의 열을 발생시키면서, 어느 정도의 수율로 일어날지 계산하는 법을 배운다. 교수님의 질문에 우리는 열역학의 시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흠.. 그렇게 커다란 공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화학 반응에서 발생할 반응열을 미리 계산해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수 백 명은 필요하지 않을까?’ 교수님의 대답은 달랐다. “POSCO를 처음 지을 당시에는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이제는 많은 계산이 자동화되어 5명 정도면 만들 수 있을 것 같네요. 열역학 수업에서 여러분이 배우게 될 많은 수식과 문제해결 방법도 실은 모두 프로그램화/패턴화 되어 있답니다.”
대학 시절 이야기
나의 본 전공은 화학공학이었다. 처음부터 화학공학에 뜻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1학년 2학기를 마치고 전공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고민 끝에 화학공학을 선택했다. 현실적인 이유가 컸다. 화학공학을 전공하면 적어도 직장 구하느라 고민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자공학, 화학공학, 기계공학은 당시 ‘공대 취업 3대장’으로 불리며 가장 인기가 높았다. 나는 당시에 가장 합리적으로 보이는 선택을 했다.
지금 나는 서버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서버 개발에 뜻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군인으로 복무하던 당시, 바깥 세상에서 개발자 시장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고 && 본 전공인 화학공학은 재미가 없으니 개발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활코딩이라는 커뮤니티를 통해 HTML/CSS와 Python을 배웠고, 전역한 이후에는 컴퓨터공학 복수전공을 시작해 각종 컴퓨터과학적 지식들을 배웠다. 그렇게 졸업하고 나니 이미 크게 늘어나있는 개발자 수요 시장에 탑승해 손쉽게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폭풍의 길목
폭풍의 길목에 서있으면 돼지도 날 수 있다.
샤오미의 회장 레이 쥔이 한 말이라고 한다.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는 곳에선, 능력이 출중하지 않은 사람도 괜찮은 성과를 거둘 수 있으니 기회를 잘 노리라는 뜻이다. 내가 인생에서 이룬 성과 중 많은 부분 역시 시대적으로 큰 흐름이 생기는 곳에 생기는 상승기류의 도움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화학공학도, 개발도 모두 당시의 나에게 상승기류 였다. 상승기류를 만나 운이 좋게 날고 있다.
Github Copilot
Github copilot은 AI 기반 코드 추천 플러그인이다. 사용자가 작성하고 있는 코드 베이스를 바탕으로 문맥을 파악해 다음에 작성할 코드를 제안해준다.
최근 Github은 Copilot을 공식 공개했다. 이제 일반 이용자는 월 $10 비용을 지불하면 Github copilot을 IDE에 설치해 사용할 수 있다. Github copilot을 사용해본 사람이라면 모두 느끼겠지만, 마치 내 의도를 읽은 것처럼 다음에 작성할 코드를 제안해주곤 한다. 귀찮고 자잘한 문법 문제를 알아서 해결해주고, 웬만한 코딩테스트 문제 역시 손쉽게 해결해버린다.
10년 후 개발자의 모습은 지금과는 매우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 Copilot은 짧은 함수를 제안해주는 정도로 그치지만, 빠른 시일 내에(3년, 혹은 더 빠르게) Copilot이 하나의 피쳐에 해당하는 코드를 제안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더이상 인간이 자잘한 코드를 작성하는 일이 불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Copilot이 더 나은 코드를 작성할 수 있도록 AI-comprehensible한 주석을 잘 다는 것이 능력이 될 수도 있고, 더 비싼 Copilot 모델을 구독하는 것이 개별 개발자의 능력이 되는 미래도 상상해볼 수 있다.
다시, 폭풍의 길목
POSCO 정도의 큰 공장을 짓는 데에 아주 적은 수의 화학공학자가 필요해진 것처럼, 하나의 서비스를 개발하는 데에 아주 적은 수의 개발자만 필요해질 것이다. 열역학 문제를 손으로 잘 풀어내는 능력이 오래전 경쟁력을 잃은 것처럼, 손으로 직접 타이핑해 코드를 구현하는 능력 역시 조만간 경쟁력을 잃게 되겠지. 코드 작성에 관해서만 이야기했지만 자신의 일이 정해진 패턴을 반복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지적 활동이라고 해도 결국 AI가 압도적으로 잘하게 될 것이다. 하고있는 일에 패턴이 없다고? AI는 패턴 찾기의 귀재다.
다시 한 번, 폭풍의 길목에 서있음을 느낀다. POSCO를 짓는 데에 아주 적은 수의 화학공학자가 필요했던 것처럼, 하나의 서비스를 개발하는 데에 아주 적은 수의 개발자만 필요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주어진 태스크를 처리하는 사람으로 남아선 미래가 불투명하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
곧 다가올 것으로 보이는 폭풍이 있다. 어느 길목은 뚱뚱한 돼지도 날아오를 것이고, 다른 어떤 길목은 날고 있던 독수리도 떨어질 것이다. 나는 어느 길목에 서있어야 할까
기획자가 되자
현재까지 내려본 나의 결론은 이것이다. 태스크를 처리하는 사람이 아닌, 처리해야할 태스크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사람. 즉, 개발하는 사람이 아닌, 무엇을 개발할지 결정하는 사람. 결국, 기획자. 우리 업의 본질 역시 유저에게 좋은 경험을 선사하는 것에 있으므로, 결국 개발자의 기획 역량이 매우 중요해질 것이라, 감히 예측해본다.